구례 화엄사 입장료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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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는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에 위치한 사찰로, 삼국시대의 고승인 연기(緣起) 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사찰은 지리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로서 한국 불교의 중요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화엄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어,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교학인 화엄종(華嚴宗)의 가르침을 선양하는 중심 도량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으로서 지역 불교 문화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화엄사의 창건과 중건에 대해서는 고대 문헌과 사적기들을 통해 다양한 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창건된 시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연기라는 승려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중관대사 해안(海眼, 1567년 생)이 1636년(인조 14년)에 작성한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을 비롯한 여러 사적기들에서는 “544년, 신라 진흥왕 5년이자 백제 성왕 22년에 인도 출신의 승려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합니다. 또한 『구례속지』에는 “신라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절을 창건하였고, 백제 법왕이 무려 3,000명의 승려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다”는 내용이 추가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후 신라 선덕여왕 시기에는 자장율사(慈藏)가 증축을 진행하였고, 문무왕 대에는 의상대사(義湘)가 장륙전을 건립하였다고도 전하나, 이에 대해서는 역사적·고고학적 의문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화엄사의 창건 연대와 관련하여, 의상대사가 조성했다고 알려진 장륙전의 석각 자료들은 8세기 후반 이후의 양식에 해당하며, 『정원본사십화엄』이 797년(신라 원성왕 13년)에 번역되었기에, 그보다 이른 시기의 인물이 이를 벽화로 새겼다는 기록은 사실과 어긋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의문은 1978년에 중요한 발견을 통해 해결되었습니다. 바로 신라 경덕왕 대의 유물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 경전의 발문에 따르면, 연기는 신라의 황룡사에 소속된 승려로서 754년(경덕왕 13년) 8월부터 사경 작업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755년 2월에 완성하였습니다. 이로써 연기 스님이 실존 인물임이 입증되었고, 화엄사의 창건 시기도 기존의 진흥왕 시기보다 훨씬 늦은 경덕왕 시기였음이 확실해졌습니다.
다만, 연기 이전에도 이 터에 사찰 또는 가람이 존재하였고, 연기에 의해 대가람으로 확대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화엄사는 이후 수차례에 걸쳐 중건과 보수가 이루어졌습니다. 신라 말기에는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도선국사(道詵)가 사찰을 대대적으로 확장하였으며, 고려 광종 때에는 홍경선사(洪慶禪師)가 퇴락한 건물을 중수하였습니다. 또한 문종은 이 절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전라도와 경상도의 곡물을 이 절에 헌납하도록 명하고, 이를 저장할 수 있는 창고 두 채를 일주문 밖에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1172년(명종 2년)에는 인종이 정인왕사(定仁王師)로 하여금 화엄사를 중수하게 하였고, 도선국사의 비석 또한 이때 건립되었습니다. 고려 말 충숙왕 때에도 조형왕사(祖衡王師)가 대규모의 중수를 진행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화엄사는 1424년(세종 6년)에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었으나, 임진왜란 중 병화로 인해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석경(石經)마저 산산조각나는 비운을 겪게 됩니다.
이에 각성대사(覺性)는 1630년(인조 8년) 중건을 시작하였으며, 7년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을 복원하였습니다. 이 중건을 계기로 화엄사는 1649년에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다시 승격되었습니다.
1702년(숙종 28년)에는 성능(性能) 스님이 장륙전을 재건하였고, 이에 숙종은 ‘각황전(覺皇殿)’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이 사찰을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으로 지위 격상시켰습니다. 이후 18세기와 19세기에도 대웅전, 보제루, 적조당 등을 수차례 중수하였습니다.
근현대에 들어와서도 화엄사의 보수와 복원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977년에는 각황전의 해체 보수 작업이 완료되었고, 1984년부터는 만월당과 일주문이 새로 건립되었습니다. 1989년에는 원융료와 청풍당이 지어졌으며, 연기암 또한 복원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