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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은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석조 건축물로, 불교 미술의 절정이라 불리는 문화재입니다. 이 찬란한 유산은 **751년(경덕왕 10년)**에 신라인 김대성(金大城)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역사적·예술적·정신적 가치로 인해 국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석굴암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시대의 고승 일연이 집필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이세부모신문왕대(大城孝二世父母神文王代)」에 남아 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지금의 석굴암)**를 창건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는 석굴을 완성하기 위해 커다란 바위를 다듬어 천장석인 감개(龕蓋)를 만들고자 했으나,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크게 낙심하여 잠이 들었고, 꿈속에서 천신(天神)이 내려와 석굴을 완성해놓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김대성은 아침에 깨어 남쪽 고개로 급히 올라가 향나무를 태우며 천신에게 공양을 올렸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이러한 전설적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석굴암은 단순한 건축물 이상의 상징성을 지니며, 신라인들의 깊은 불심과 민족의식이 깃든 신앙의 성소입니다. 석굴암은 미학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당시 신라인의 정신세계와 문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신라인들이 지녔던 고유한 종교적 신념과 철학, 그리고 국가의 안위를 기원하는 마음이 석굴이라는 형이상학적 공간에 담긴 것입니다.
석굴암은 단지 김대성이라는 한 사람의 신앙적 발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당시 신라 사회 전체의 종교적 공감대와 민족적 이상이 결합된 산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는 곧 석굴암이 개인의 원찰이자 국가적 수호를 위한 국찰로서의 성격도 함께 지닌다는 뜻입니다.
석굴암이 자리한 토함산은 신라의 오악(五岳) 중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예로부터 신성한 산으로 존숭받아 왔습니다. 토함산은 그 이름 자체가 가진 의미와 지리적 위치로 인해 용(龍)신앙과 결부된 영산(靈山)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석굴암이 그러한 장소에 건립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불교 신앙과 국가의 안위를 염원하는 기운이 응축된 선택임을 의미합니다.
더욱이, 토함산 일대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이었습니다. 신라의 문무왕은 죽은 뒤에도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서원을 남겼고, 그의 유해는 동해의 대왕암에 안치되었습니다. 또 다른 전설에는 **석탈해(昔脫解)**가 동해로부터 상륙하여 토함산 정상에 오른 이야기가 있으며, 이는 토함산이 동해에서 서라벌로 통하는 최단 경로에 위치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석굴암이 지리적 요충지이자 국가 방위의 상징적 지점에 자리하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